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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사성어

[ 공명수죽백 - 功名垂竹帛 ]

by 청호반 2022. 2.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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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 공 / 이름 명 / 드리울 수 / 대나무 죽 / 비단 백 )

공명을  대나무와 비단에 드리워 있다.  대나무와 비단은 종이가 발명되기 이전에 글을 쓰는 도구로 이용되었다. 공명은 공을 이룬 뒤에 따르는 명예를 말한다. 그러므로 이 성어의 뜻은 "큰 공을 이뤄 그 명예가 역사에 길이 전한다."는 말로 사람이 큰 일을 계획하면서 자신의 포부를 말할 때 많이 쓰인다.

 

< 출 전 > 사기(史記). 장승상열전(張丞相列傳) / 후한서.등우전(鄧禹傳)

사기 장승장열전에 보면 "공명은 그 시대에 밝히 드러나는 것이다. "功名有著於世者"라는 말이 있고,

후한서 등우전에서는 다음과 같다.

등우는 후한 광무제(光武帝, 25~57)를 섬긴 어진 신하로서 그는 광무제가 후한 왕조를 다시 세우는 데 크게 이바지한 공신이었다. 등우는 소년 시절 장안으로 가서 공부를 했는데, 그때 유수(劉受:뒤의 광무)도 장안에 와서 공부하고 있었다.

 

 등우는 아직 나이가 어려서 사람들과 상종하는 일도 별로 없었지만, 유수를 만나자 그가 비범한 사람이란 것을 알고 친교를 청했다. 이리하여 서로 다정하게 지내던 두 사람은 몇 년 후 각자 자기 고향으로 돌아갔다. 

 새로 신(新)이란 나라를 세운 왕망(王莽, BC 45~AD 23)의 폭정에 견디다 못한 백성들은 도처에서 반기를 들고 한나라 왕실을 다시 일으키려는 호걸들 밑으로 모여들었다. 이리하여 한나라 왕실의 후예로 반란군 대장에 추대된 유현(劉玄)이 왕망을 쳐서 죽이고, 갱시장군(更始將軍)에서  다시 황제로 추대되어 장안에 도읍을 정했다.

 

 이 유현이 바로 갱시제(更始帝)였는데, 이때 많은 호걸들은 등우를 갱시제에게 천거했다. 그러나 등우는 끝내 사양하고 갱시제를 섬기지 않았다. 등우는 갱시제를 하찮은 인물로 보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동안 유수가 황하(黃河) 이북 땅을 평정하러 떠났다는 말이 들려오자, 등우는 즉시 북으로 황하를 건너가 업(業)이란 곳에서 유수를 만났다. 유수는 뜻하지 않게 다시 만난 그를 몹시 반갑게는 대했지만, 속으로는 벼슬을 부탁하러 왔으려니 했다. 그러나 며칠이 지나도 그런 눈치가 전연 보이지 않았으므로, 유수는 등우에게 멀리 여기까지 자기를 만나러 온 까닭을 조용히 물었다. 등우는 분명히 말했다.

 

 "다만 명공의 위덕이 사해에 더해지기를 바랄 뿐입니다. 나는 미력이나마 바쳐 공명을 죽백에 드리울 뿐입니다.(但願明公威德加於四海  禹得效其尺寸  垂功名於竹帛矣)"

 이 말을 듣자, 유수는 마음속으로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는 등우를 군영에 머무르게 하고 동장군이란 칭호를 주었다. 이때부터 두 사람의 뜻을 합친 새로운 경영이 시작된 것이다.

 

 그 뒤 두 사람은 왕낭(王郎)의 군사를 토벌하기 시작, 먼저 낙양을 함락시켰다. 이때 유수는 지도를 펴 놓고 등우에게 보이며,

 "천하에는 이렇게 많은 고을과 나라들이 있는데, 이제 나는 겨우 그 하나를 손에 넣었을 뿐이오"하고 탄식을 했다.

 

그러자 등우는 ,

 "지금 천하가 어지러워 사람들의 고생이 극도에 달한지라, 마치 어린아이가 사랑하는 어머니를 그리워하듯 명군(明君)의 출현을 바라고 있습니다. 예부터 천하를 손에 넣는 데는 덕(德)의 후박(厚薄)이 중요하지 영토의 크고 작음은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유수는 이 말에 크게 감동을 받았다. 등우는 언제나 옆에서 유수를 이렇게 격려했다. 또 많은 인재들을 추천했는데, 그가 사람을 보는 눈은 조금도 틀리는 데가 없었다. 그 뒤 오래지 않아 유수는 광무제로서 천자의 위에 올랐는데, 거기에는 등우의 힘이 컸다. 그의 말대로 광무제의 위덕은 사해에 널리 퍼지고, 등우의 공명은 죽백에 드리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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